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워싱턴 (문단 편집) ===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===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이 독립에 성공한 이후 그는 미련없이 총사령관 자리를 내려놓고 고향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가 농장 경영에 집중했다.[* 조지 워싱턴은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와 같은 이름이었는데, 독립 전쟁 후반 미국의 독립이 거의 확정된 상태에서 "만일 미국이 독립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이후 워싱턴은 어떤 행보를 보일까"에 대한 얘기가 영국에서 나왔는데 미국 사절단이 "미련없이 총사령관 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"이라고 얘기를 하자 이 말을 들은 [[조지 3세]]는 '''"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것"'''이라는 묘한 예언을 남겼다.] 워싱턴은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대륙회의에서 기존의 연합규약은 서로 따로 놀던 주들을 한 나라로 묶어놓기에는 취약하다면서 진정으로 주들이 한 나라로 단결하기 위해서는 전 국가적인 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. 그리고 워싱턴의 우려대로 1786년 [[매사추세츠]]에서 매사추세츠 주 당국의 과세 정책에 반발한 셰이즈의 봉기(Shays' Rebellion)가 일어나자 헌법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. 이에 1787년 5월 25일 대륙회의는 [[필라델피아]]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워싱턴은 버지니아주 대표이자 제헌회의 의장으로 참석하여 헌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. 1787년 9월 17일 총 7개조로 이루어진 미국 헌법 초안이 완성되어 1787년 12월 7일 [[델라웨어]]부터 시작으로 1790년 5월 29일 [[로드아일랜드]]를 마지막으로 13개 주가 비준을 완료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연방국가 미합중국이 탄생하였다. 헌법까지 완성이 되자 진짜 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워싱턴은 완전히 은퇴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. 그런데 이제는 행정부의 수장인 [[미국 대통령|대통령]]을 처음으로 선출해야 했는데 초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워싱턴뿐이었다. 워싱턴 본인은 '내 할 일은 다 끝났으니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'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다른 사람들은 워싱턴한테 '''"제발 대통령이 되어주세요!"'''라고 청원하면서 워싱턴을 난감하게 하고 있었다. 결국 워싱턴은 다른 사람들의 추대로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. '''만장일치'''로 선출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워싱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.[* 당시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행사하며 투표하고 싶은 2명에게 각각 1표씩 투표해서 1위가 대통령, 2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방식이었는데 워싱턴은 모든 선거인단에게서 1표씩 받았다. 득표율은 50%이지만 모든 선거인단이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으므로 사실상 만장일치이다. 더 대단한 점은 선거인단이 아닌 유권자 투표에서도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는 점. 재선 때도 그랬는데, 다만 부통령은 [[존 애덤스]]와 조지 클린턴이 경쟁을 통해 선출되었다. 단, 1820년 [[제임스 먼로]]의 재선 선거에서는 후보자가 한 명뿐이었는데, 선거인단 선거 지지율은 100%였지만 [[존 퀸시 애덤스]]를 찍은 반란표로 선거인단 만장일치는 없었다(228/231).] 워싱턴은 취임 후 대통령 직책도 꽤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, 퇴임할 때도 그는 [[국왕]]이 되려는 마음이 [[공화주의|전혀 없었던지라]][* 비록 워싱턴은 대통령 재직 시절 "폐하"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게 하고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등 국왕와 다를 바 없는 언행을 했지만, 워싱턴은 단순히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아니라 '''세계 최초의''' 대통령이다. 역사적 전례가 없는 직책을 처음 떠맡았으니 참고할 만한 사례는 전무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개념을 "[[선거군주제|투표로 뽑는 국왕]]" 비슷한 개념으로 시작하게 된 것. 그리고 그의 이후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단지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유럽 황가를 참조했을 뿐 제왕적인 행보는 전혀 밟지 않았다.] 임기를 2번만 치르고 물러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. 세상에 수많은 집권자들이 유능하고 자격도 있고 공적도 있던 이들이 10년, 20년씩 장기집권하며 점차 독재자가 되어가는 걸 생각하면 이는 매우 큰 업적이다. 대통령 시절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[[존 애덤스]], [[알렉산더 해밀턴]], [[토머스 제퍼슨]] 등이 주도하는 정파간 대립이 심화되자 이를 어느정도 통솔하는 모습도 보였고, 내각(cabinet) 시스템, 국가 [[중앙은행]] 설립(1차 미국은행. 20년 간 존속한다) 등 헌법에 기술되지 않은 대통령의 임무도 나름 잘 수행했다. 새로 창설된 미국 의회와 오랜 시간 협의한 끝에, [[세금]] 제도도 개편하여 [[소득세]], [[법인세]] 등 직접세 위주의 세수 기반을 확보했다. 또한 대통령한테 부여된 [[거부권]]도 한 차례 행사하여 [[미국 의회]]를 견제하면서, 해당 법안을 의회에서 재의결하자 그대로 수용하는 등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획정에도 힘을 썼다. 그리고 [[인구주택총조사]]([[센서스]])와 토지-[[부동산]] 총조사 시행이란 업적도 남겼다. 초기 대통령으로써 [[미국]]이라는 나라의 인구와 토지, 건물의 측량과 세입 기반을 확정하는 데에 2기 동안 진행된 8년 대통령 임기 중 6년을 투자했다. 미국은 워싱턴이 계획한 센서스 방식을 21세기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. 워싱턴은 매우 청렴한 성격으로 미국이란 신생국 정부가 [[뇌물]]이 오가는 부패한 공무원들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며, 의회에 요청해 청탁금지법을 만들었다. 국가직, 지방직, 의회 공무원을 불문하고 공무원과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무원이 속한 정부 부처에서만 선물을 받을 수 있고, 그 외에서는 [[선물]]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. 심지어 생일파티도 외부인사를 초청하지 못하게 하고 공직사회 내부인원들끼리만 시켰다. 조지 워싱턴 본인부터 대통령직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타 정치인이나 민원인들로부터 각종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. 청탁금지법은 위반이 적발되면 즉시 공무원 직에서 파면하는 법안이었다. 허나 이 청탁금지법은 워싱턴 50년 후 [[앤드루 잭슨]]이 폐지시켜버리는데, 이후 미국 정치권은 19세기 [[엽관제]]가 횡행하고 20세기 좀 주춤하나 싶더니 21세기에는 [[로비]]를 아예 비범죄화 하는 등 완전히 [[쇼미더머니]]를 보여주고 있다.[* 미국 정치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단순한 탐욕 때문에 합법화한 것은 아니다. 불법이던 시절에도 로비는 있어왔으며, 오히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는 로비가 더 심했기 때문에, 이럴바에는 로비를 합법화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대신, 시민들의 눈을 믿고 투표장에서 심판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로비 합법화의 근본 취지였다. 하지만 미국인의 정치 감시 능력은 미국 정치인이 생각한 것보다 [[미국인#s-3.2|더 낮았다]].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실행하는 선거를 평범한 시민의 눈만으로 공정하게 분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